(한국문화의이해)대중 목욕의 역사와 변화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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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2-11-26 09:30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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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화의이해)대중 목욕의 역사와 변화에 대하여
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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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목욕 culture history
국내 대중 목욕탕의 現況 analysis
목욕 culture에 대한 설문지 및 설문조사 analysis
세계의 목욕 culture에 대해
conclusion 도출
[우리나라 목욕탕 history]
문헌에 기록된 우리나라 최초의 목욕은 신라시조 박혁거세와 그의 왕비 알영이 동천과 북천에서 각각 목욕한 것으로부터 처음 됐다고 한다.
특히 혼례를 앞둔 규수는 난탕을 비롯해 인삼달인 인삼탕, 창포탕, 복숭아잎탕, 마늘탕 등을 이용했다고 한다. 이를 위해 대갓집에서는 목욕시설인 정방을 집안에 설치하고 조루(팥, 녹두를 갈아서 만든 가루비누)만들어 저장했다고 한다.
이처럼 삼국시대나 조선시대를 통해본 우리나라 목욕은 신체를 청결히 하는 수단외에 점차 미용, 건강, 질병치료목적 및 종교의식 수단으로 활용됐음을 알 수 있따
[대중목욕장 유래(由來)]
1910년 일본…(省略)
다. 조선시대의 목욕형태는 유교적 사상으로 노출을 꺼려 벌거숭이로 목욕하지 않고 옷을 입은 채로 신체의 부분을 씻었고 여인들은 허리위 반신욕 정도로 목욕을 끝냈다고 한다.
상류사회에서는 어린애 피부를 희게 하기 위해 복숭아 꽃 물로 세수시키거나 목욕시켰고 어른과 여자는 난초 삶은 난탕에 목욕함으로서 피부를 희고 부드럽게 하고 몸에서 향냄새가 나도록 했다고 한다. 그 당시의 목욕은 청결 미용 또는 의식절차 수단으로 주로 활용됐으며 경주 안압지에서 출토된 석조욕조는 비록 왕족들의 전용 욕장 이지만 야외 목욕장까지 만들어 사용했고 이 석조 조형물은 바닥을 마개로 막게 하고 구멍과 등받이 및 여과장치까지 갖추어져 있어 당시 신라인들의 지혜와 목욕탕 구조를 파악하는데 큰 data(資料)가 되고 있따
신라시대는 절에 대형 공중목욕장이 설치되고 가정에도 목욕시설을 한 것으로 보아 목욕재개를 중시하는 종교의식(불교의식)의 影響(영향)이 목욕culture에 크게 끼쳤을 것으로 판단된다
고려인들은 신라인들에 비해 더 사치스런 목욕을 즐겼다고 하는데 기록(서긍의 고려도경)에 의하면 하루 서, 너 次例(차례) 목욕을 하였고 개성 시냇가에서는 남, 여가 혼욕까지 했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청결위주의 대중목욕이 중시되어 6월 보름날이 되면 계곡과 냇가에서 목욕과 물 맞이를 했고 제례 전에는 반드시 목욕재계하는 관습이 성행했다.